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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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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장협 사무국 작성일23-03-04 16:01 조회1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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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 강의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도회 고성 수도원)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Francisca Romana, 또는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귀족인 부소(Busso) 가문의 파올로(Paolo)와 자코벨라(Giacobella)의 딸로서 이탈리아 로마의 중심부인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12세 때에 인근의 부유한 영주인 폰치아노(Ponziano)의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와 결혼하여 38여 년 동안 이상적인 결혼생활의 모범처럼 살았다. 그들은 자녀 셋을 두었으나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집안사를 보면 첫아들 요한은 포로로 잡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페스트가 전쟁으로 인해 생겨나 프란치스카의 둘째 아들과 딸이 그 병으로 죽었다. 황폐한 폰치아니 농장에서 농부들이 음식을 구걸하기 위해 프란치스카에게 왔다. 프란치스카는 환자들, 굶주린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데 헌신하였다. 그룹으로 조직된 로마의 부인들이 그녀의 일을 돕기로 하였다. 얼마동안 그녀도 페스트에 걸렸으나, 잠시 후 금방 회복되어 자선사업을 계속하였다. 이때 프란치스카의 죽은 둘째 아들이 나타나서 대천사를 그녀의 수호천사로 모셔다 드렸다. 수호천사는 그녀가 조그마한 잘못을 저지르거나 하면 자신을 감추어서, 그녀가 통회의 행실을 보여 줄 때까지 다시는 빛을 발하지 않았다. 큰아들 요한은 전쟁에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떤 경솔한 성품의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그 여자는 프란치스카를 매우 싫어하여 화를 내다가 이상한 병에 걸려 괴로와했다. 프란치스카의 다정한 손길이 그녀를 치료해준 후 며느리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프란치스카는 집안일을 며느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도시의 자선사업에 전적으로 봉사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금욕적인 기질이 강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흑사병과 내란으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할 때, 그녀는 자선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녀는 시누이인 반노차(Vannozza)와 함께 로마의 걸인들을 위하여 조직적인 봉사활동을 전개하여 높은 성덕을 쌓아 나갔다. 그녀는 성 알렉시우스(Alexius)의 환시를 본 뒤로 앓고 있던 중병에서 회복되었고, 1400년 그녀의 아들인 요한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가 태어날 때까지 산토 스피리투(Sancto Spiritu)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또 다시 흑사병과 기근이 로마에 들이닥쳤을 때, 그녀는 이 재앙의 희생자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기 위하여 자신의 보석까지 팔았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에 재앙이 닥쳐왔다. 1408년에 대립교황의 편이었던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오(Ladislao)가 로마를 점령했을 때, 여자들은 남아 있었으나 교황의 편에 서 있던 남편 라우렌티우스는 피신해야만 했다. 게다가 폰치아니(Ponziani)성이 약탈당하고 캄파니아(Campania)의 집도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1413년의 또 다른 흑사병 때문에 아들 에반젤리스타(Evangelista)가 희생되자 그녀는 자기 집을 아예 병원으로 개조하였다. 불행은 계속 이어져 2년 후에는 그녀의 딸 아녜스(Agnes)마저 사망하였다. 1414년경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고, 남편의 추방령도 해제되어 돌아오고 재산도 되찾았지만 남편의 건강은 아주 나빴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남편을 간호하는 한편 그녀의 모범을 따르는 귀족 부인 등과 함께 자선활동을 계속하면서 봉쇄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자선을 실천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로 결정하였다. 1433년 3월 25일, 처음에는 마리아의 오블라티회(Oblate di S. Maria)로 알려졌지만 후에 캄피돌리오(Campidoglio) 근처에 있는 '스페키의 탑'(Tor de Specchi) 근처에 있다고 하여 토르 데 스페키의 오블라티회로 알려졌고, 다시 현재의 성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오블라티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436년에 남편이 죽은 후에 그녀는 그 수녀원에 들어갔다. 겸손을 표시하기 위해 맨발로 목에 줄을 걸고 톨레 디 스페키 수도원의 문전에 엎드려 공동체에 받아들여줄 것을 간청하며 겸손히 들어갔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수녀원에 입회한 후 원장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남은 4년 동안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자선 사업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녀는 수차례나 환시를 보았고, 탈혼에 빠졌으며, 치유의 기적을 행하였고,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그녀는 대이교의 종말을 예언하였다. 그녀는 1608년 5월 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성녀가 밤낮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데 수호천사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으며, 칠흑 같은 로마의 밤거리를 다니는 동안 수호천사가 동행하며 등불로 길을 비춰주었다는 전설에 근거해 1925년에 그녀를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녀는 또한 이탈리아 가정주부와 미망인의 모범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봉헌자들의 수녀회 총장이었던 마리아 막달레나 안킬라리아가 쓴 「로마의 성 녀 프란치스카의 전기」에서 (Cap. 6-7: Acta sanctorum Martii 2, 188-189) ^성녀 프란치스카의 인내와 사랑^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카에게 일어난 재앙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만성적이고 심한 질병을 통해서도 그녀의 인내심을 시험하고자 하셨다. 그럼에도 그녀가 짜증을 내거나 자신에게 해주는 간호가 아무리 서툴러도 불만을 드러내는 것을 누구도 보지 못했다. 프란치스카는 그토록 사랑하던 자녀들이 채 크기도 전에 죽어 갔을 때, 자신의 확고부동한 인내를 보여 주었다. 그녀는 항상 평온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고,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그분께 감사를 드렸다. 자기를 비판하고 중상 모략하는 사람들의 말과, 자신의 생활양식을 비방하는 이들을 똑같은 인내로써 견디어 낼 수 있었다. 또 자신과 자신이 한일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에게 결코 반감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아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카를 단순히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만 뽑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을 이웃의 영신적이고 육신적 복지를 위해 쓰도록 간택하셨기 때문에, 그녀에게 어진 성격을 주셨다. 그래서 그녀를 대하는 이들은 누구나 즉시 그녀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으로 사로 잡혀, 그녀가 지시 하는 것을 순순히 따랐다. 하느님의 권능은 그녀가 하는 말이 위대한 효과를 거두도록 하셨다. 그래서 프란치스카는 간단한 말 한마디만 해도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근심하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성난 이들에게 마음을 진정시켜 주며, 원수들을 화해로 이끌어 오래된 증오와 악심을 없애주고, 언젠가는 앙갚음하려는 사람들의 복수심을 막으며, 한마디로 사람들의 걱정을 가라앉히고 그것을 올바른 목표에로 이끌어 주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녀를 안전한 피난처로 여기고 사방에서 와 그에게 모여 들었다. 비록 그녀가 직선적으로 죄를 힐책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느님을 진노케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 없이 벌을 주어도, 찾아오는 이들은 한결같이 위로를 받고 떠났다. 그 때 로마에는 생명을 앗아가는 여러 가지 전염병들이 돌고 있었다. 전염의 위험도 불사하고 거리낌 없이 나아가, 고통 받는 이들과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선 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한 다음, 분주하게 간호해주면서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병이 어떤 것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먼저 그들 때문에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견디어 내신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그 고통을 견디도록 격려해 주었다. 프란치스카는 자기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던 병자들만을 간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오두막집이나 공립병원을 찾아가 목말라하는 환자들에게 물을 주고 침상을 마련해주며 상처를 싸매주었다. 더럽고 참기 어려운 것 일수록 더 세심히, 더 성심껏 간호해 주었다. 그가 「깜포산또」라는 병원에 갈 때에는 그 병원의 제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음식과 진미를 늘 가지고 갔다. 집에 돌아올 때에는 그들의 낡은 옷가지와 더러운 속옷을 가지고와 깨끗이 빨아서 마치 주님 친히 입으실 옷인 듯 정성과 세심한 주의를 쏟아 수선하고 향수를 뿌리고는 고이 접어서 상자에 넣었다. 프란치스카는 38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 때에도 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돌보면서 이런 일들을 했다. 그는 특히 싼타 마리아 병원, 트라스 테베레의 싼타 체칠리아 병원, 시씨아의 산또 스피리또 병원, 그리고 깜포산또 병원에서 이런 일들을 했다. 전염병이 만연하던 이 때에는 육신을 돌볼 의사들만이 아니고 영혼에게 봉사할 사제들마저 찾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제들을 찾아내어 고백성사나 성체성사를 받을 환자들에게 모시고 갔다. 그리고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비용으로, 한 사제의 생활비를 충당했고 그 사제는 위에서 언급한 병원들을 찾아가 그가 알려 준 환자들을 방문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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